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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숙 여의도책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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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숙 여의도책방-15

봄바람은 미나리를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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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Oenanthe javanica(BL.)DC.라는 학명으로 α-pinene, myrcene, terpinolene, dimethyl phthalate 등의 성분을 포함한 한약재명 ‘수근’(水芹)은 바로 미나리이다. 최근 미나리를 다루는 각종 프로그램이 쏟아지는 이유는 단지 봄이라서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윤여정님이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온갖 화제몰이를 이어가고 있는 영화 『미나리』도 한 몫을 하는 듯하다.

영화 속에서 친정엄마가 한국에서부터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꾸러미에는 고춧가루, 멸치, 한약 그리고 미나리씨가 들어있다. 고춧가루와 멸치는 한국 사람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민족의 밥상 정서를, 한약은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찐득한 사랑을, 그리고 미나리씨는 낯선 타국에 잘 정착해 보려는 이민자들 특유의 강인한 생존본능을 상징하는 것 같다. 고춧가루와 멸치는 식(食)을 통한 신(身)을, 한약과 미나리씨는 정성(精誠)을 통한 정신(精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국에서 고생 중인 딸네 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챙겨주고 싶은 친정엄니의 눈물겨움이 녹아있는 것으로 야매 영화평론가인 나만의 해석도 더해본다.     

“용든 거야.. 비싼 거야..” 엄마 한예리는 아들 데이빗이 한 방울도 남김 없이 꿀꺽꿀꺽 한약을 마셔주기를 바라지만 까맣고 쓴 한약을 너무 힘들어하는 데이빗. 심장 질환으로 달리기마저 금지당한 손자를 위해 녹용까지 넣어 지어온 한약처방은 무엇이었을까? 심허증을 치료하는 사군자탕? 심실증을 치료하는 반하사심탕? 상초열울을 다스리는 청심연자탕? 아니면 심담허겁을 달래주는 귀비탕? 병아리감별사 일을 하러 떠난 엄마의 감시가 없는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 없는 데이빗은 한약을 싱크대에 폐기해 버리고 그 대신 동변(童便)을 쥬스인 척 할머니에게 대접하는 고약한 장난으로 소심한 복수를 해 버린다. 


영화 ‘미나리’로 인해 미나리(수근)에 대한 관심 늘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것은 국룰인지라 영화 『미나리』 덕분에 미나리 기사도 많을 게 뻔할 듯해서 구글링을 해보니 3월12일자 경향신문(박효순 기자, 김달래 사상체질의학 전문의 도움말)에 『원더풀 미나리... 영화 ‘미나리’열풍, 먹는 미나리도 뜬다』라는 기사가 바로 검색되었다. “미나리는 염증을 가라앉히고 대소변 배설 촉진, 가슴 답답함, 부종, 질염, 방광염, 변비, 불면증, 황달에 효과가 있으며 술독을 풀어주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식욕을 높여주고 지혈을 돕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미나리 기사 몇 개 읽고 창을 닫으려는데 이번에는 도라지 기사가 기어이 클릭을 유도한다. 『국내 연구진 ‘심봤다’ ... 도라지 성분, 코로나 치료 효과 입증』이라는 제목의 3월18일자 조선일보(이영완 기자, 이창준 기초과학연구원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장) 기사에 따르면 도라지에 있는 ‘플라티코틴 D’라는 성분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 세포와 융합하는 과정을 차단해 감염을 막을 수 있음을 세포 실험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플라티코틴 D를 호흡기에 투여하는 약물로 개발하기 위해 동물 실험을 준비하고 있으며 여기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오랫동안 섭취한 천연 성분이라 인체 대상 임상시험은 무리 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는 듯하다.    

“정력 강화, 부인병 개선, 아토피 치료, 시력 향상, 청력 강화, 중이염 개선, 회춘, 기억력 향상 이 모든 것에 도움을 주는 산수유발효차, 산수유엑기스로 귀한 분들에게 건강을 선물하세요.” 라디오와 홈쇼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구례산 산수유로 만든 건강기능식품 광고문구이다. 정말 저 많은 효능을 산수유가 다 낼 수 있다는 걸까? 효과는 낸다는 분야끼리의 인과관계는 전혀 없어보이지만 그러나 일단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법한 그래서 여기저기에 일단 효과가 있다고 빨대라도 꽂아보자는 심뽀로 범벅된 엉성한 꼼꼼함. 

국산 한약재로 지역단위 농협에서 개발했다는 견고딕체의 굳세보이는 글자 옆으로 유명세는 수십년 전의 과거가 되어버린, 이름과 얼굴이 알려질락말락 했던 연예인의 엄지척 사진과 함께 원형으로 잘려진 반명함판 사이즈의 증명사진 안에는 여지없이 한의학박사님들이 효능을 입증하셨거나 성분을 배합하셨다며 엄근진 표정을 짓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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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반대말은 비과학이 아니라 체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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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일간지의 전면광고 두세 페이지가 이러한 한약재가 주인공인 건강보조식품으로 채워지고 있는 걸 보면 이 시장의 수요와 공급은 여전히 활발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두의 친구들은 아무의 친구도 아니듯 저 많은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뭐든지 확실한 효과는 단 한가지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협 제품을 소비하는 것은 국내농가를 살리는 착한 소비라는 자부심과 대면효도가 어려운 이 시국에 비싸지도 저렴하지도 않은 가격의 건강식품을 택배 보내는 것으로 효심을 표현하려는 선한 소비자들은 미나리, 도라지, 산수유제품들의 지속가능한 전면광고를 당분간은 보장해줄 것이다. 

 

효능, 기능성, 약효, 약초, 신비 등의 단어들이 나열된 기사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앞선다. 대부분이 과장이거나 과잉정보를 나열한 유치한 광고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매운 맛에 대한 자료를 찾느라 『FLAVOR,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접하면서 알게 된 최낙언 선생님은 왕성한 활동력을 소유하신 식품공학자로서 맛, 식품, 성분 등에 대한 날 선 비판과 관련 지식을 집대성한 많은 저서들을 바탕으로 개인채널(최낙언TV, www.seehint.com)을 통해서도 대중과의 소통과 광범위한 자료공유까지 해주시는 고마운 분이다.“과학의 반대말은 비과학이 아니라 체험담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이 한 문장 때문에 다시 한 번 최낙언 선생님의 책 『식품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법』을 집어들었다. 이 분야의 타골장인답게 건강전도사들을 포함한 다양한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내신다.

 

 

- 초기에 아직 충분한 과학적인 결론이 없는 분야는 당연히 체험담이 소중하고 개별적인 결과도 소중하다. 체험담은 과학적 결론보다 대부분 설득력과 뉴스성이 훨씬 좋다. 

- 체험담에 믿음이 가는 이유는 우리 몸에 익숙한 원시인의 흔적 때문이다. 

- 체험담은 항상 100%의 놀라운 체험들 뿐이다. 신뢰도가 가장 낮은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생생하고 쉽고 재미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믿는다. 그래서 부작용도 가장 많다. 

- 식품의 효능이나 건강의 문제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단지 익숙하여 쉽게 보일 뿐이다. 내면에 복잡성을 모르면 실제 식품을 오래 연구한 사람보다도 쉽게 말할 수 있다. 식품을 제대로 공부하면 너무나 얽히고 설킨 복잡성 때문에 우물쭈물하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는 건강전도사는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것이 대세인 세상이다. 

- 요즘은 쇼닥터, 닥터테이너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각종 건강 쇼 프로그램이 넘친다. 문제는 방송에서 사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의학적 근거가 없는 시술이나 건강기능식품을 추천하는 의사들이다. 소비자들이 의사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진짜 전문가들은 연구하고 치료하느라 바쁘고, 진실보다는 소비자 입맛에 맞는 말을 할 줄 아는 인기 야합의 사이비 전문가들이 너무 많이 언론에서 맹활약하는 실정이다. 

- 처음으로 디스크 환자의 상태를 볼 수 있게 되자 수술이 권장되었다. 그랬다가 재발이 많아지고 허리에 통증이 없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사람 중에도 디스크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을 보고, 이제는 수술을 하지 않는 비수술 치료가 증가하고 있다. 분석의 기술과 해석의 기술의 불균형한 발전인 경우이다. 

- 체계적인 검토의 결과는 대부분 일반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극적인 결과는 없다. 그러다 보니 뭔가 화끈하고 선명한 결과를 좋아하는 소비자의 입맛에는 확실히 체험담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진실의 반대말은 신념이고, 과학의 반대말은 체험담이라는 최 선생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많은 환자들의 다양한 ‘체험담’을 열심히 경청 중이다. 한의사로서 환자들을 상담하는 과정은 그 내용이 무대뽀스러운 신념에 기반해있거나 과학적 근거 없는 체험을 길게 늘어놓더라도 가끔은 인내를 가지고 환자가 내 앞에까지 오게 된 과정을 알아야 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이런 대화는 치료과정 전반에 걸친 예상 가능한 어려움들을 예방해주고 환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나름대로 요약을 해가며 가끔은 환자가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의 개입도 곁들여가며 일단은 최대한 많이 들어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환자들의 체험담, 치료과정에서 환자 성향 파악에 ‘절대적 도움’


이 글을 쓰고 있던 한참 바빴던 오후에는 오른쪽 다리저림으로 한 달을 절뚝거리다가 나한테 침 한 번 맞고 기적처럼 나았다고 주장하시는 부서 팀장님의 ‘체험담’을 근거삼아 유사한 증상으로 나에게 첫 침 치료를 시도하러 온 95년생 초진 환자를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기도 했다. 물론 그 팀장님처럼 또 하나의 기적을 경험시켜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한의원을 처음 찾아온 그에게 침 치료를 편안하게 받을 수 있도록 굳게 잠겨있던 마음의 문은 스르륵 열어준 것 같아서 오늘 하루 중 가장 보람있는 순간이었다.    

재보궐로 여의도는 한창 시끄럽다. 봄날의 절정인 4월 초, 서울시장도 부산시장도 새로운 얼굴을 맞이할 것이다. 한의협도 그 사이 새 회장님을 맞이하였다. 새 회장단에게 하나 건의하고 싶은 게 있다. 개인적으로 ‘첩약건보 시범사업’이라는 용어가 나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봉침하면 봉춤이, 매선하면 야매가, 첩약하면 첩첩산중, 첩년이 떠오른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인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frame)을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했다. 언어는 의미를 규정하고 의미는 이미지를 강화한다. 한자 기반의 많은 용어들,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그래서 역사와 관습을 두텁게 입고 있는 한의계의 관습 용어에 대대적인 세련됨을 가미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첩약’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이미지가 2021년 한의학에 합당하고 충분하냐고 진심으로 묻고 싶다. 


한의학의 관습용어도 세련미 가미…현대에 합당한 이미지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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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분다. 지방대는 망해나가고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이며 학생들이 없어서 텅 비어버린 캠퍼스 곳곳은 봄쑥을 뜯는 동네 할매들로 넘쳐날 것이다. 영화 『미나리』로 60개가 넘는 상을 받으신 윤여정님이 ‘75살까지 존버하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라며 격함 감동마저 쉬크하게 표현하셨다. 나는 그녀가 말한 존버의 ‘존’을 ‘존재감’의 ‘존’으로 바꿔 부르고 싶다. ‘존재감을 확장해가며 버티자’는 구호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까?! 겨우 환자들의 체험담에 기대어 환자들의 호전, 악화에 일희일비했기에 희망과 좌절의 시소 위에서 꽤 자주 업다운을 겪어야 했다. 아직도 임상 실력이 미천한지라 날마다 한의사로서의 생존 가능성과 존재의 이유를 가끔 혹은 자주 고민하는 요즘이다. 싱숭이 생숭이가 요동치는 봄날이라 그런가 보다. 간만에 보고싶은 선배에게 갑자기 전화해서 오늘밤에 만나자고 벙개를 제안했더니 ‘콜콜콜’이란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한심하구나…” 평일의 상춘음주를 상상하니 판소리 한 대목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우리 모두에게 미나리보다 향기로운 봄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하며…


신미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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